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백림 사건 (문단 편집) == 서유럽 교민이 타겟이 된 이유 == 당시 일부 유학생들이나 재독인사들이 동독의 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접촉한 사실은 분명히 있었다. 윤이상은 동베를린을 거쳐서 북한을 방문한 사실도 있다. 또 이 사람들 중에는 금품이나 향응, 난수표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. 그러나 대부분이 난수표가 담긴 봉투를 뜯어 보지도 않고 귀국하거나 아니면 아예 간첩 행위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첩죄가 성립되지 않았던 것이다. [[먹튀|북한 사람들에게 얻어먹기만 하고 실제로 북한을 돕는 등의 일은 없었던 것]]이다. 당시 [[대한민국]]은 세계 [[최빈국]] 중 하나였고 [[북한]]은 국력이 대한민국보다 나은 편이었다. 이에 북한 대사관 직원들은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줬고 유학생들은 밥 한 끼 얻어먹는 게 별일인가 싶어서 얻어먹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. 또한 서베를린에서 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만난 것은 단순한 접촉에 불과할 뿐 간첩을 목적으로 한 통신 및 회합에 해당하지 않는다. 게다가 1950년대 후반이나 60년대 초반 경에 유학을 떠난 사람들 중에는 [[남북분단]]은 물론 북한이 적국(敵國)이라는 인식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. 멸공이 국시로 등장하고 본격적으로 전국민이 남북분단을 제대로 인지하게 된 것은 [[5.16 군사정변]] 이후다. 물론 6.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이므로 북한에 대한 반감은 당연히 존재했다. 그러나 동시에 분단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오히려 [[남북관계]]에 대한 급진적인 생각도 많이 남아 있었다. 즉 '곧 있으면 [[남북통일|통일]] 되겠지' 내지는 '원래 한 나라인데 좀 다녀오는 게 뭐가 큰일이라고' 생각해서 큰 거리감 없이 접촉한 것이다. 이들 대부분이 예술인들이어서 정치·사상적으로 다소 자유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점도 한 몫 했다. 한 예로 윤이상은 북한에 가서 친구를 만나고 남포의 강서대묘를 방문해 [[고구려]] 고분벽화인 [[사신도]]를 보고 왔다. 사신도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얻기 위해 보러 갔던 것. 지금 생각하면 허탈할 정도로 안이한 행동이긴 했다. 또 그들은 동서 분단을 마주했던 독일도 그 시절까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왕래가 자유로웠으니 북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. 덕분에 본국에 소환되어서 중정 직원들이 "당신은 왜 동백림을 통해서 북한에 방문했는가"라고 묻자 '''"어? 다녀오면 안 돼요?"'''라고 오히려 되묻는 경우도 있었다고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